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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 事實과 상관없이 진영 논리로 나를 공격했다"
2019.05.13
의원실 | 조회 814

'80년 서울의 봄' 누가 밀고자였나, 심재철 자유한국당의원


지난달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이 KBS 예능 프로에 출연해 "1980년 합수부에 끌려가 진술서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찾게 됐다" "수사국장도 감동시킨 문장력" "진술서 잘 써서 비밀조직에 속한 동지들을 지킬 수 있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할 때만 해도 지금의 상황이 전개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서울대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스물한 살 청년의 자필 진술서가 다른 민주화 인사 77명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됐다. 신군부에게 상세 좌표(座標)를 찍어줄 만큼 그렇게 절박했나"라며 '밀고자(密告者)' 공방에 불을 댕겼다. 운동권 동지였던 심재철과 유시민 간에 '80년 서울의 봄'을 둘러싼 진실 게임은 수사·재판 기록 공개와 주변 인사들의 가세로 판이 커지고 있다. 심재철(61) 의원을 만난 것은 어쨌든 그가 논쟁을 촉발한 쪽이었기 때문이다.

심재철 의원은 "당시 수사를 받았던 사람들은 남의 이름을 분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이덕훈 기자―유시민씨는 예능 프로에서 자기 자랑을 좀 한 것이다. 이게 '진실을 왜곡했다'며 정색할 만한 사안인지 모르겠다. 원래 그런 사람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았나?

"예능이라도 사실 관계를 왜곡하며 자기 자랑을 하나. 수사(搜査)를 받아본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남의 이름을 불었던 것에 대해 미안함과 죄책감, 부끄러움이 있게 마련이다. 다들 그런 상처가 있다. 나는 수사를 잘 받았다는 식으로 얘기를 못 하는 것이다.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39년 전에 했던 진술을 지금 와서 따지겠다는 것도 지나친 느낌이 있는데?

"1995년 재심(再審) 청구를 하면서 처음 '유시민 진술서'를 접했다. 굳이 안 불어도 될 사안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놓은 걸 보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데 뻔뻔스럽게 자기 문장력을 자랑하고 다른 비밀조직은 완벽하게 지켰다는 식으로 자신을 미화까지 하니…"

―그 시점에 연행된 서울대생만 수십 명이 됐다. 수사기관의 강압적 분위기에서 일기(日記) 쓰듯이 시시콜콜 모두 쓸 수밖에 없었다. 유시민의 진술서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나도 부끄러운 면이 있지만 안 쓰고 넘어가도 될 것 같으면 안 썼다. 가령 다섯 명이 모였으면 두 명은 기억 안 난다는 식으로 덜 불려고 했다. 남의 이름을 적는 것에 고민이 있는 것이다. 유시민은 굳이 안 써도 되는 내용까지 미주알고주알 풀어놓았다."

―그 진술서에는 공개된 학생회 간부와 몇몇 복학생, 행사나 회합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유시민 주장대로 수사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감춰야 할 것은 감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공개돼 있어도 진술서에 너무 상세하게 나온다. 며칠날 누가 무엇을 했거나 말했다며 구체적인 혐의를 제공했다. 그가 고문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으면 이해하겠지만 자기 입으로 맞지 않기 위해 열심히 썼다고 했지 않나. 수사국장이 칭찬해줬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처음부터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잘 불었다는 것 아닌가."

―유시민은 5월 17일 체포됐고, 첫 진술서는 6월 12일 작성됐다. 그 첫머리에 '일전에 미처 진술하지 못한 사항이나 잘못된 사항, 불명확한 사항을 상세히, 잘못을 수정하고 명확하게 진술코저 합니다'라는 구절을 보면, 수사관의 요구에 따라 수십 차례 쓴 뒤 이게 1차 진술서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자세하게 불었던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럴 수 있겠지만 유시민 혼자서만 90쪽을 적어 냈다(심재철의 1차 진술서는 13쪽). 그는 진술서 내용이 공개되자 '심재철 의원이 진술한 내용에 맞춰 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내 첫 진술서는 6월 30일에 작성됐는데 황당한 소리 아닌가."

―이에 유시민은 "진술서는 처음부터 창작이었다"고 해명했는데?

"무슨 창작인가. 나와 처음 만난 시점만 빼면 진술서 내용 99%가 모두 사실이다. 유시민 진술로 인해 행적이 밝혀진 77명 중 미체포자 18명에 대해 6월 17일 지명 수배가 떨어졌다."

―이들은 그전부터 수사 당국의 사전 검거 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단지 그 시점에 지명 수배됐다고 봐야 하지 않나?

"유시민 진술 때문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그의 진술로 수사 초점이 바뀐 것도 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관련한 중간 수사 발표(5월 22일)에서는 김대중과 대학 운동권의 연결고리로 '연청'을 지목했다. 하지만 유시민 진술서에서 '민청협(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이라고 특정하자, 6월 14일부터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던 어른들의 입에서 '민청협' 진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연으로만 볼 수 있겠나."

―이번 논쟁에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이 유시민을 적극 편들고 나왔는데.

"1980년에 윤호중은 서울대 입학도 안 했다. 그는 1984년 논문 자료를 찾기 위해 서울대에 왔던 방통대생 등 민간인 4명을 프락치로 몰아 감금 폭행한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서 유시민과 공범이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유시민은 1년형을 살았다. 이는 민주화 투쟁과는 전혀 무관한 집단 린치와 물고문까지 한 범죄였다. 하지만 유시민에게는 그때 쓴 '항소이유서'가 소위 명문(名文)이라고 해서 세간에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됐다.

"가해자들은 장관도 됐고 국회의원도 됐지만, 피해자들의 망가진 삶이 어떠했는지 월간조선(2006년 2월호)에 보도된 적 있었다."

―이번 논쟁에서도 승자(勝者)는 유시민인 것 같다. 저쪽 진영에서는 당신을 향해 '가롯 유다' '변절자'라고 공격하고 있다.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자들이 유죄를 받은 것은 당신이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수사·재판 기록을 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체포되기 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다른 피고인들의 자백으로 혐의 입증이 완성돼 있었다.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의장'이라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 때문이었다. 부인 이희호씨가 '한민통'과의 관계를 인정했고, 최측근 김상현 등 3인도 그렇게 진술했다. 나는 '한민통'과는 전혀 무관해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김대중 측의 배후 조종을 받고 학생 시위를 이끌었다는 내란음모 혐의와 관련돼 있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이해찬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먼저 잡힌 심재철이 자백해 내가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명백한 허위다. 이해찬이 체포된 날은 6월 24일이고, 내가 자수한 날은 6월 30일이었다. 내가 자수하기 전에 이해찬은 합수부에서 이미 3차례 진술했다. 무려 277쪽으로, 피의자 진술서 중 최대 분량이다. 모두 다 불었던 셈이다. 그는 민주화 동지 101명의 이름과 행적, 전과를 적은 7쪽짜리 리스트도 제출했다."

―그동안 이해찬은 당신을 인간 취급 하지 않는다는 식의 언행을 보여왔는데?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왔다. 사실과 상관없이 정치 진영 논리로 나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해찬 진술서에는 나와 관련된 분량이 8쪽이고 내 이름만 7번 나왔다. 수사관은 이를 근거로 나를 추궁했다. 내 진술서에는 이해찬 이름이 단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이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고문 강압에 의해 허위 진술했다"고 번복했지 않나?

"당시 수사·재판 기록이 모든 걸 말해줄 것이다. 이들은 법정에서 재판관이 '고문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 27명 중 16명이 선처를 바란다는 반성문까지 썼다. 뒷날 재심이 열렸을 때 이들은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 자체가 고문이었다' '조사실에 불을 켜놓아 잠을 못 자는 게 고문이었다'는 식으로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심재철의 진술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완성됐다'는 게 정설처럼 되어 있는데.

"내란음모 사건 판결문에는 핵심 증인으로 29명의 이름이 나오지만, 내 이름은 증거 목록, 다른 피고인들의 공소사실 입증 증거 그 어디에도 없다. 김대중 사형선고나 다른 피고인들의 중형 선고는 나와는 법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총학생회장 때 나는 김대중 등 정치인과 거리를 뒀고 개인적으로 그의 돈을 받은 적도 없었다."

―왜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나?

"다른 사람들이 어떤 진술을 했는지 몰랐다. 재심 청구를 할 때 일부 자료를 확보했고, 최근에 전체적으로 자료를 보면서 '80년 서울의 봄'과 관련된 진실이 이랬구나를 알게 됐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몇 달 복역했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군대에 징집됐다. 그는 복학한 뒤 운동권 중심부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은 유시민이 됐다.

"그전에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둘러싼 학내 노선 투쟁이 있었다. 그때 신군부와 붙었어야 했는데 회군 결정을 한 것은 오류였다고 정리됐다. 서울역 회군 때문에 광주 유혈 사태가 났다는 논리도 만들어졌다. 만약 그때 회군하지 않았다면 서울 사태가 나지 않았을까. 군대에 끌려가 보니 군은 프로였고 학생들은 허술한 아마추어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중학교 영어 교사를 거쳐 1985년 MBC 기자로 입사했다. 이번에 논쟁이 벌어지자 '그가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MBC에 들어갈 수 있었겠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5공 정부는 공안사범의 복학, 시국사범 교수들의 복교 허용 등 유화정책을 폈다. 운동권 딱지 때문에 못 들어갔던 언론사나 대기업에 취직 문이 열렸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MBC에 들어갔다. 면접 때는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80년 서울의 봄'에는 아지랑이가 너무 많이 피어올라 실체와 허상을 헷갈리게 했다.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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