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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국회부의장, 김홍걸 허위사실 유포에 법적 대응 나서
2017.12.06
의원실 | 조회 69

드림디자이너

심 재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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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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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국회부의장, 김홍걸 허위사실 유포에 법적 대응 나서

- “만 허위자백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대부분 허위자백 밝혀져

- “전향의 대가로 MBC 입사주장도 터무니없는 사실 법적 책임 물을 것

 

 

심재철 국회부의장은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법적인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1) 김홍걸 위원장은 124sbs라디오 김용민의 뉴스브리핑을 통해 ‘(신군부의 고문에) 다른 분들은 다 당당하게 끝까지 버텼는데 심재철만 그들에게 굴복을 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하지만 5.18광주민주화 국회 청문회 증언 및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당사자들의 다수의 저서와 인터뷰에 따르면 김대중 전대통령을 포함 24인의 피의자 대부분이 압력, 고문 등에 못이겨 허위 자백한 바 있다(첨부자료 참조).

 

심재철 부의장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24인 중 가장 나중인 80630일에 잡혔으며, 이미 짜여진 시나리오(심재철 부의장이 김대중씨에게 백만원 수령했다는 52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중간수사결과 발표), 다른 사람들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진술서에 기초한 공소장에 따라 허위 진술하도록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2) 김홍걸 위원장이 당시 수사관이 심재철 부의장을 데리고 동교동 집에 사전 답사했다는 발언도 허무맹랑한 허위사실이다. 19885.18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와 신동아 19986월호에 따르면 김대중 전대통령이 당시 5백만원을 받았다고 거짓 자백했다고 수차례 증언한 사람은 심 부의장이 아니라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던 정동년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동아 자료에 따르면 1980년 당시 군 검찰부의 신문조서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은 광주 상황 이전에 정동년씨를 만난 사실과 정씨에게 5백만원을 제공한 사실을 시인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정동년은 1980413일 경 처음으로 본인 집을 찾아와 63사태 당시 제적당하여 복학한 정동년이라고 인사하기에5519:50경 한국정치문화연구소장 김상현을 따라 방문하여 먼저 내실에서 김상현과 만났다. 김상현이 하는 말이 정동년은 15년만에 복학한 전남대생으로 데모자금 5백만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지원하여 주는 것이 어떠냐고 하기에미리 김상현에게 3백만원을 준 다음 정동년을 불렀더니”(신동아 19986월호)

 

김홍걸 위원장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심 부의장이 학생신분에 천만원은 너무 많아서 오백만원으로 낮춰 거짓 진술하였다고 한 것은 완전 허구이며 정동년씨에 관한 보도를 심 부의장으로 악의적으로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

 

정동년씨가 광주사태 이전에 김대중씨를 만나 자금을 교부받았다는 합수부에서의 진술은 고문에 못 이겨 합수부측이 날조한 대로 진술해준 것이다. 당시 조사관들이 김대중씨로부터 돈을 받고 광주사건을 주모했다는 것을 인정하라면서 금액을 정하는 단계에서 얼마로 정할까, 학생에게 1천만원을 주었다면 너무 많은 액수지. 그러니까 너는 5백만원을 받은 것이다. 잘 기억해둬라. 5백만원이다라고 진술을 강요했다.”(신동아 19986월호)

 

김대중 전대통령은 19885·18광주민주화운동 TV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정동년씨가 수사관을 통해 사전 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제가 김상현씨가 아까 그 낭독한대로 저희 방에 와서 정동년하고 같이와서 저한테 돈을 받아갔고 그쪽으로 넘겨주었다. 그렇게 상현씨의 자필 자술서라는 것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제가 보고 그러면 상현의원이 여기 서울시내에 있으니까 지하실에 갇혀 있는 줄 몰랐지요. 있으니까 그럼 상현의원을 나하고 대질시켜 주시오. 대질시키면 본인이 내방에 왔던 것을 알 것 아닙니까? 이러고 대질을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인가 다음다음 날인가 다시 김상현의원 진술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때는 김상현의원은 와서 정동년씨를 저한테 소개만하고 나가버렸고 나중에 정동년이 집에 한참 있다가 청년정치문화연구소에 찾아와서 내가 김대중씨로부터 이렇게 돈을 받았읍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렇게 김상현씨의 진술내용이 달라져있어요. 그래서 제가 보고 이거 굉장히 고통을 받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동년씨도 곧 증인신문하면 아시지만 우리집에 한번도 와본 일이 없기 때문에요. 안방을 이렇게 도면을 수사관들이 그려주면서 여기가 침대가 있고 여기 농이 있고 이렇게 해 가면서 정동년씨를 훈련을 시켰다고 그래요.”

 

 

(3) 김홍걸 위원장은 심재철 국회부의장이 MBC에 입사한 것과 관련해 악질 학생운동 출신이 국가에서 통제하던 방송국 기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데 확실하게 전향을 한 것이다는 취지의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하지만 1984년부터 전두환 정부의 유화정책으로 시국사범의 복학이 허용되었고, 심재철 국회부의장이 MBC에 입사했던 1985년에는 언론사와 대기업에 운동권 출신들 상당수가 취직하던 시기였다. 실제로 심 부의장은 MBC에 공채로 입사해 방송사 최초로 언론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역임했으며 방송민주화 투쟁으로 옥고를 치뤘다.

 

심재철 국회부의장은 신군부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롯한 피의자 대부분이 허위 자백한 역사적 아픔을 모를 리 없는 김홍걸 위원장이 명백히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본인의 MBC공채와 방송민주화 경력을 전향의 대가로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단정하는 악의적인 주장은 지극히 반인격적이며 이에 대해서는 법적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4) 최근 민주당, 정의당 일부 의원들이 공공연하게 SNS 인터뷰 등을 통해 김대중 전대통령이 심부의장의 자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허위사실 등을 유포했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와 다수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사형선고는 한통련사건 관련 용공혐의인 국가보안법 위반 때문이었음을 증언했다.(첨부자료 9 참조).

 

사실이 위와 같음에도 무분별하게 허위사실로 음해하는 행위에 대해서 심 부의장은 법적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심 부의장은 허위사실 유포 행위가 심각한 민병두 의원에 대해서는 지난 1일 형사 고소했으며 다른 의원들에 대해서도 법적 조치를 준비 중이다.

 

 

2017. 12. 5.

국회의원 심 재 철

 

 

<첨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허위자백을 인정한 각종 자료

 

자료 1) 김대중

 

신경식위원

아까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학봉위원이 회유를 하는데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씀도 하셨고 또 양보를 하지 않았다고 말씀도 하셨고 또 양보를 하지 않았다고 그러셨는데 그런데 이 탄원서만큼은 써달라고 한다고 그대로 써서 친필로 쓰고 또 지장까지 찍은 것은 좀

 

증인 김대중

제가 양보 안 한다는 것은 제가 용공분자라는 것을 승인한 것은 목숨걸고도 양보를 안 했다. 나머지는 그때 사정으로 할수 없어서 허위자백도 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신경식위원

그러면 이것도 허위자백하는 그런 범주에 속하는 탄원서였읍니까?

 

증인 김대중

그것은 요식행위로서 필요하다고 느꼈기때문에 써준 것입니다.그리고 제가 거기 썼지만 미국가서 국가에 해된 일 하거나 안보를 해친 일 한일 없습니다.

 

정창화 위원

다음 확인하겠습니다. 증인께서서는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고문과 또 그 상대방 때문에 허위로라도 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공부문만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인정을 하지 않았다라고 오전에 진술하셨읍니다.(생략)

 

증인 김대중

용공부문은 저 한사람한테 국한된 문제니까 제가 그것을 싸워서 거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제는 여러 분하고 관련되었는데 그 분들이 이미 허위자백을 했어요. 그리고 허위자백이 참 견딜 수 없는 고문에 의해서 했는데 제가 더 우겨봤자 방법이 없어요. 그분들에게 고통만 자꾸 더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쪽 부분은 저도 할 수 없이 승인을 하고 법정에 가서 싸우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용공부분은 또 하나는 저로서는 죽고 사는 문제니까 또 이것을 승인한다는 것은 저뿐 아니라 저희동기들이나 자식들한테까지 큰 영향이 미치는 문제니까 제가 그것을 결사적으로 반대를 한 것이지요.

 

(중략)

 

조찬형위원

다음에 아까 다른 위원도 물었읍니다마는 중복되지 않는 범위에서 묻겠읍니다. 정동년관련입니다.아까 말씀하시기는 체포된지 약 15일후에 정동년문제가 거론되었다고 말씀을 하셨읍니다. 그런데 정동년을 거론할 때 증인은 전혀 본 일도 없고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보자 아니면 대질이라도 해 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증인께서는 전혀 모른다 이렇게 처음에 부인을 하시다가 결국 경찰조서를 보면 시인이 다 되어있읍니다. 자백한 것으로 다 되어있읍니다 진술서도 쓰셨읍니다. 그와 같이 허위자백한 이유는 정신적 고문에 의해서 허위자백하셨다고 하셨읍니다.

 

증인 김대중

정신적 육체적 고통 거기다가

 

조찬형위원

.그런데 군 수사기관에서는 그렇게 해서 시인을허위자백을 하셨고 그런데 또 검찰에서도 허위자백을 하셨읍니다. 그 이유는 아까 말씀하시기를 군 검찰관의 유도신문에 당하신 것처럼

 

증인 김대중

. 유도신문도 있고 아까 말씀과 같이 모든 것 법정에 가서 하겠다는 생각도 있고

 

조찬형위원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좀 해 주십시오.

 

증인 김대중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잠도 안 재우고 그래가지고 아주 극도로 피로한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또 묻고 그리고 공기도햇빛도 한 번도 못 보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아주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서 그것도 더구나 여러가지 타격이 컸기 때문에 그랬는데 거기다가 정동년씨와 김상현씨의 자술서가 온 것을 보고 뭐더 이상 나 혼자 해보았자 도리가 없구나 생각해서 .그 사람들 하자는대로 해 주었지요.(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7(9))

 

 

자료 2) 이문영, 한승헌, 이해동, 송기원, 설훈

 

하나의 약함은 1980년에 취조받았을 때 무죄한 김대중 씨를 내란의 괴수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내란자로 허위 자백한 것입니다. 혹독한 고문에 의한 것이지만 비록 죽더라도 안 한 것을 안 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약함입니다. (이문영, 한승헌, 이해동, 송기원, 설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

 

 

자료 3) 고은

 

군법회의(군사재판)에 앞서 군 검찰관 조사가 있었다. 내가 작가 송기원에게 그의 어린 딸에게 주라고 건넨 돈 5천원이 0을 몇 개 더 붙여 50만 원이 되었다. 5천 원이 50만 원이 되는 동안 나는 말할 수 없는 닦달을 받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0이 하나씩 늘어났다. 그래서 50만 원이 되어갔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늘려가기 전에 송기원 쪽에서도 고문 끝내 0이 늘어났고 그곳에서 늘어나면 내 조서에도 늘어났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나와 김대중 의장을 연결시켰던 것이다. 내가 동교동에서 데모 공작금 50만 원을 받아 송기원에게 두 번으로 나눠 전달하여 서울역 데모를 지령한 것으로 만들어, 세 피의자의 진술서에 똑같이 조작된 공작금 50만원 부분이 명기되었다.(고은, 그날 0시 이후 p.159,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

 

 

자료 4) 김상현

 

517.(중략) 그들은 명함판 사진을 한 뭉치 가져오더니 나에게 이 가운데에서 아는 얼굴을 대라고 했다. 조성우, 이신범, 이재오 등 낯익은 얼굴들이 꽤 있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그들은 한 사람의 사진을 들이대고는 아는 얼굴이 아니냐며 집중 추궁했는데, 그가 바로 정동년 씨였다. 나로서는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실랑이가 계속된 끝에 그들은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내가 김후보에게 정동년 씨를 직접 데려가 소개하고, 김후보로부터 5백만 원을 받아 민중봉기자금으로 지원한 뒤 봉기를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제시한 정씨의 진술서에 따르면, 김 후보가 정씨에게 김상현 의원과 모든 것을 의논하고 지시를 받으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도 아닐뿐더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나에게 시인하고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일주일간 단식까지 하며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 후보도 서명하고, 나도 서명할 수 밖에 없었다. (김상현, 내가 겪은 80, 그리고 광주 p219,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

 

 

자료 5) 이해동

 

또 하나 나를 몹시 괴롭힌 것은 내가 그렇듯 거짖진술을 함으로써 그 피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거짖진술에 따른 피해를 내가 받는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모든 것은 김대중 선생 한 분을 잡자는 데 귀착되니 결과적으로 나는 김대중 선생을 죽이는 데 일조를 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이해동, 내 잔이 넘치나이다 p.203,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

 

 

자료 6) 송건호

 

내가 수사를 받은 것은 520일부터 69일까지 만 19일간이었다. 나는 그때의 체험을 통해 고백한다. 인간이란 육체적 고통을 참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만약 노련한 수사관이 연행해 온 피의자한테 모종의 자술을 받고자 한다면 100%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수사관은 내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않은 일을 시인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그 거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4일 만엔가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것을 허위로 자백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그곳에서 맞아 죽거나 평생 불구자가 될 것 같았다.(송건호, 자술서 아닌 자술서 p.90,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

 

 

자료 7) 김종완

 

중앙정보부로 끌려온지 48일째(71일경) (중략) 김대중 선생도 시인했소, 김선생. 다른 사람들도 다 시인했단 말이오. 시인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당신 하나뿐이오. (중략)

몇 차례 끌려가서 조사를 받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순서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들에게는 항상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완전한 수사기록이 갖춰져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러므로 수사가 아니었다. 이미 조작해 놓은 수사기록에다 사람들의 진술을 억지로 꿰맞추는 것이었다. 그런 짓을 위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행위가 다름아닌 고문이요, 악형이었다. (김종완, 군화발에 짓밟힌 민주화의 봄, P117,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

 

 

자료 8) 정동년

 

정창화위원

되었읍니다. 아까 증인께서는 정동년이라는 사람에게는 854월경에 처음으로 만났고 돈을 주었거나 하는 사실은 전혀 없었다고 진술하셨읍니다. 당시의 수사기록 저희 광주특위에 제출된 수사기록을 보면 정동년은 군사법경찰 수사단계에서 열세번 군검찰 수사단계에서 두번 그리고 군법무사앞에서 세번 도합 18회에 걸쳐 김상현씨를 통하여 증인으로 부터 돈을 수령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자백한 바가 있읍니다.이렇게 열여덟번씩이나 그것이 허위로 자백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증인 김대중

그것은 그런 공포 분위기하에서 본인이 일단 뭐든지 자백하겠다고 했으니까 수사관측이 요구하는대로 몇번이든지 했겠지요.(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자료 9) 김대중 대통령 사형선고는 국가보안법 위반, 곧 한통련 관련

 

신기하위원

군법회의에서 당시 증인에게 사형선고를 한 범죄사실과 그 죄명은 무엇인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겠읍니까?

 

증인 김대중

그 죄명은 제가 알기는 국가보안법 11항 반국가단체의 수괴 그리고 내란선동 기타인 데 사형의 죄목은 국가보안법 11항 그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인제위원

그래서 이 사람들이 그 후에 81년도에 개정한 계엄법 제10111호에 국가보안법을 계엄하의 군법회의에서 재판할 수 있도록 이렇게 넣었습니다. 증인에게 결국 사형언도를 내린 범죄사실은 한민통인가 하는 것과 관련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이 사실이지요?

 

증인 김대중

그렇습니다.(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김대중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적 근거는 일본의 한민통과 관련하여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죄명이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이고 김대중 선생이 그 수괴라는 죄명이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이고 김대중 선생이 그 수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검찰을 여xx라는 조총련계 간첩(말로는 전향한 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그는 군검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증언을 했는데 그의 증언을 듣고 있던 우리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언사는 그야말로 친북적인 표현과 어투였기 때문이다.

(이해동, 내 잔이 넘치옵니다 p196,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

 

 

자료 10) 신군부의 사전 시나리오에 의해 조사 진행

 

52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김대중사건 수사결과 중간발표란 문서를 배포했다. 김대중은 공산주의사상을 가졌던 사람이고 학생시위를 선동, 정부를 전복하여 집권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중략)특히 김대중이 서울대 시위를 조종했다는 부분은 완전히 조작이었다. 복학생 심재권을 통해 총학생회장 심재철에게 돈을 주고 시위를 선동했다는 발표는 사실과 달랐다. 심재권, 심재철은 피신하여 체포되지 않고 있었다. 체포되지 않은 두 사람이 일을 다 했다고 발표한것이다.(이신범, 광야의 끝에서 p.82, 실천문학사, 1991)

 

잡혀가자마자 내 앞에 들이 민 공소장은 이미 정교하게 짜여져 있었다. 나는 그들의 각본에 맞춰진 역할을 인정할 것을 강요받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대목은 김대중 씨의 지시와 연결고리에 있었다. 잔혹한 매질과 고문이 시작되었다. 뼈마저도 묽은 죽이 되어버린 듯 힘이 없었다. (조성우, 구부러진 한길, 2004)

 

55일중(517일부터) 그들의 각본에 따라 진술서라는 것을 쓰도록 강요당하고 그것에 따라 조서가 조작된 것은 20여 일 동안이고 그 때 이후부터는 그들의 공소를 위한 의견서라는 것을 작성하면서 몇 번씩이나 고쳐쓰는 데 시간이 소비되었다.

(예춘호, 민주투사들을 제물로 삼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진실, 2002, 문이당)

 

그이(김녹영)은 출소한 뒤 어느 지인과 애기할 때 당국의 조작된 그 사건을 이렇게 애기했다. “그 당시 우리는 상대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내가 중앙정보부에 갔을 때 이미 그들은 치밀한 각본에 의해 모든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이미 조사해 놓았으며 더욱이 김대중씨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다.”라고 (조영창(김녹영의원 부인, 19805월을 생각하면서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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