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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15. 서울역해산 때문에 5.18. 광주희생이 났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왜곡된 역사 인식 유감
2020.05.18
의원실 | 조회 53

<보도자료>

80.5.15. 서울역해산 때문에 5.18. 광주희생이 났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왜곡된 역사 인식 유감

 

문대통령은 17일 한 방송사와의 대담에서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그런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하고 맞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대통령이 대학생들의 서울역 시위 해산 때문에 광주에서 희생이 났다고 역사를 왜곡한 것이며 서울역 시위에서 해산하지 않고 맞섰으면 신군부가 유혈진압을 못했을 것이다는 대통령의 가정은 역사적 진실과 배치된다.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기밀문서 43건에는 서울역 시위와 상관없이 이미 7일 전에 계엄군은 학생시위에 대비한다며 군을 재배치했고 5.17. 김대중 등 체포명단을 작성해 놓았음이 확인된다.

 

“5.8 계엄군 13여단이 서울 동남쪽(거여동)으로 이동했고 5.10 특전사 11여단이 김포로 이동하여 1여단과 합류, 통합된 2개 부대 약 천오백명은 다시 서울로 이동하였고 추가로 포항에 주둔중인 해군을 대전, 부산 이동가능성도 있다.”(주미대사관이 백악관에 보낸 긴급 비밀 전문#0 0709067, 05781)

 

5.18.시위의 배경에 대해서도 미대사관은 5.17 김대중 체포가 광주민심을 즉각적으로 자극했음을 보고하고(주미대사관의 미국무부 긴급 비밀 전문#0 220938Z 05781)’, 5.26. “광주 학생시위대는 김대중과 그의 측근들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주미대사관이 백악관에 보낸 긴급 비밀 전문#0 261513Z, 261542Z 2),

 

문대통령이 말했던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핵심 당사자인 김대중씨의 인식과도 배치된다.

 

1. 김대중씨는 학생시위 자체가 신군부에 빌미가 되었고 전술적 잘못이며 학생시위가 없었더라도 신군부는 학생시위를 조장해 계엄확대 명분을 삼았을 것이라고 증언.

 

학생들이 데모를 하게 된 전술적인 잘못 때문에 이렇게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규하 대통령 발표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국회도 5.20 소집하게 되었는데 국회 개회를 보고 그 뒤에 데모를 해야 되는데 12일 날 데모는 안하다고 해놓고 13일 거리로 뛰어나왔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김대중 119차 공판 최후진술 속기록 000333)

 

1988.11.18.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국회청문회에서 김대중씨는 학생들이 시위를 안하고 조용히 있었더라도 신군부는 5.17 조치를 감행했을 것이고, 학생시위를 조장해서라도 계엄확대 명분을 삼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金光一위원 : 그리고 학생시위 자제문제가 나왔는데 만약 그 당시에 515일과 같은 극렬한 시위가 계속되지 않았고 학생들이 잠잠했다면 군부들이 5·17(: 비상계엄확대와 감대중씨 등 주요인사 체포)과 같은 조치를 안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증인 金大中 : 저는 그래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학생들이 516일 시위를 중단했는데 517일 일을 저지른 것을 보고

 

2. 김대중씨는 광주 5.18. 시위는 신군부가 자신을 체포했기 때문이라고 증언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역 시위 해산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홀로 신군부와 맞섰다고 주장했는데 김대중씨는 정부에 민주화 일정을 앞당길 것을 압박한 서울지역 학생시위와는 상관없이 광주 5.18. 시위는 5.17. 신군부가 자신을 체포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5.18. 0시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모든 지역에서 시위가 중지되었지만 광주에서는 김대중 석방을 외치는 시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517)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을 체포했다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것을 듣고 광주 시민들이 다음날인 518일에 대대적인 저항을 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김대중 즉시 석방’, ‘비상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투쟁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일본NHK취재반 구성, 1999, 도서출판 인동, p.119)

 

미국대사관 긴급비밀 전문에도 광주 학생 시위대가 내건 5개 조건중 하나가 김대중석방’.(주미대사관이 백악관에 보낸 긴급 비밀 전문#0 261513Z, 261542Z 2)이라고 나와 있다.

 

3. 신군부는 이미 53일부터 군사배치 시작

 

문재인 대통령은 대담에서 나는 그때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말하자면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주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지역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주 가혹한 그런 진압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5.15. 서울역 시위에서 해산하지 않고 맞섰으면 신군부가 유혈 진압을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군의 가혹한 진압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문대통령과 달리 현장 핵심인 김대중씨는 물리적인 투쟁이 일어났을 때 군하고 충돌 투쟁을 하면 혼란을 구실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역습의 기회를 주게 된다고 했습니다.”(김대중 119차 공판 최후진술 속기록 000331)라고 증언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서울역에서 해산을 하지 않았다면 그날 밤 어떤 유혈충돌이 생겼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훗날 밝혀졌지만 이미 53일부터 계엄군의 배치가 이뤄졌다.

 

육본작명 제12-80, 13-80호에 따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출동이 불가피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5.3.에 특전사 9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켰고, 5.7.에는 특전사 13여단을 서울 거여동에 이동시켰으며, 5.8.에는 특전사 11여단을 김포에 이동시켜 대기상태에 두고 있었습니다.”(1995.3.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 내란목적 살인 피의자전두환 답변서)

 

서울의 봄 당시 미국의 비밀전문 체로키 파일을 최초로 폭로한 미국 팀 샤록 기자도 5.15 서울역 시위 주변의 계엄군 재배치를 보도했다.

 

“14일에는 3공수여단이 국립묘지에 진주했고 15일과 16일에는 20사단 3개연대가 각각 효창운동장 등 서울시내 중요 거점에 배치되는 등”(‘미국의 전두환 권력 찬탈협조 전모. 시사저널 1996.3.7.)

 

 

 

4. 5.15. 서울역 해산과 상관없이 5.13. 신군부는 5.17. 김대중 등 체포명단 완성

 

5.15. 서울역에서 시위를 지속해야 했다는 문대통령의 주장은 서울역 시위 해산을 서울역 회군으로 폄훼한, 80년대 학생운동권을 장악한 주사파적 사고에 매몰된 정치적 선동과 궤를 같이한다. 실제 5.15. 서울역 시위 해산 이틀 전인 5.17. 신군부는 김대중씨 등 체포 명단을 완성했다.

 

주한미국대사관과 백악관 등 미 고위 행정부 사이의 비밀전문에도 5.13. 신군부는 이미 학생시위 배후조종자는 국가기강 문란자로, 부정부패 행위자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나누는 등 5.17. 체포대상자 명단작업을 완료했음이 확인된다.

 

5. 학생 가두시위에 대한 국민 반응이 너무 냉랭해 학생들은 시위를 지속할 동력을 상실

 

무엇보다 5.15. 서울역 시위 등 학생 가두시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왔다. 김대중씨는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513일 밤에 시위가 일어나자 시민들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냉정했다. 학생들은 완전히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김대중,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9, 도서출판 인동, p.116)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동 피고인 이해찬(당시 서울대 복학생)씨도 마찬가지로 진술했다.

 

“14일 가두시위를 평가하는데 공통된 의사는 시민들 반응이 나쁘고 교통장애가 심하여 운전수들 불평이 심하여 우리들이 왜 데모하는지를 잘 모르더라. 따라서 15일까지만 가두시위를 하고 일단 중지하는게 좋다.”(이해찬 합수부 진술서 000429)

 

주한미국대사관은 비밀전문에서 이 같은 시민들의 차가운 반응은 경제위기와 북한을 자극해 안보위기를 염려한 때문이라는 분석을 한다.

 

5.15. 오후 서울역 광장에 모인 사람 수는 10만명 이었다고 하지만 실제 5.15. 학생시위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803월과 4월 대학가에는 학생운동이 즉각 가두시위로 나서서 민주화를 위해 국민들을 선도해야 한다는 강경론과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에 시민들이 아직 충분히 공감하지 않는 상황이라 가두시위는 당분간 조심해야 한다는 온건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각 대학별로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복학생들의 상당수는 강경론 쪽이었고 다수 재학생들과 학생회장단들은 온건론이 지배적이어서 학생시위는 교내시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5월 들어 상황 변화는 더욱 급해졌다. 5.10. 전국 85개 대학 총학장회의에서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돌입하면 휴교 조치를 할 것을 결의하자 5.11. 서울대 주최로 열린 서울시내 25여개 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신현확 총리와의 TV생방송 대담을 제의하고 휴교령이 내리면 싸울 것과 5.16. 전국대학대표자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가두시위를 자제하고 있던 그런 상황에서 5.13. 늦은 오후 연세대에서 최초로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큰 저항없이 교문이 돌파된 것이 신군부의 음모란 시각도 있음.) 이에 따라 5.13. 22:00경 서울시내 10여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긴급히 모였는데 더 이상 학생들의 가두진출 요구를 막기만 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다수였다. 학생들의 가두진출 요구는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것이 서울역 시위로 터져 나온 것이다.

 

6. 일부 학생시위가 폭력적으로 흘렀고 통제불능 상태로 빠짐

 

5.15. 서울역 시위는 각 대학별 역할 분담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할지 등 사전에 구체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다보니 현장 지휘체계는 아예 없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삐삐도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이 필요하면 사람이 달려가야 하던 때였다. 서울역 광장의 학생들은 광화문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경찰의 남대문 부근의 1차 저지선에 막혀 있었고 광화문, 종로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전경들과 대치가 계속되는 중에 남대문 근처에서 신원불상자가 버스를 탈취해 대치 중인 경찰을 덮쳐 현장에서 경찰 1명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아울러 군부대가 이동한다는 소식도 전해졌고 학생지도부는 어둠이 깔리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대책을 세워야 했다.

 

각 대학으로 사람이 달려가 연락이 닿는 대로 모인 9개 대학의 긴급 회의가 서울역 현장에 있었던 서울대 마이크로 버스 안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밤새도록 계속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일단 각자 학교로 돌아갈 것인가. 마이크로 버스 안에서 벌어진 난상토론 끝에 결국 야간에 어떤 충돌이 생길지도 모르고, 야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통제 불가능한 유혈사태가 날 수도 있음을 모두가 우려했다. 또 학생들이 시내에 진출할 때 시민들이 보여준 냉랭한 반응을 볼 때 대국민 홍보작업이 더 필요하다는 데에도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이뤄진 것이 서울역 해산이다.

 

당시 일부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질되는 것도 우려되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법정에서 설훈은 피고측 변호사, 검사 그리고 재판장의 질문 모두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인 폭력시위를 시인했다.

 

설훈: 폭력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도 저항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잘못하니까 시위를 하는 것이고 폭력화하는 것은 정부가 총과 칼로써 막기 때문입니다.

재판장: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경찰이 저지를 하면 그에 수반하여 학생시위가 극렬해지고 질서가 문란해지면 결국 군이 출동하게 되고 그에 따른 충돌로 인해 희생자가 생기게 되면 4.19와 같은 사태가 벌어져 무정부 상태가 되어 현정부는 붕괴되는 것으로 체계화되는데 피고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설훈: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면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계엄령을 해제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군이 투입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설훈 19차 공판속기록, 001915-001916)

 

7. ‘서울역 시위 계속됐다면 광주 유혈진압이 없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가정은 무책임한 역사적 가정

 

서울역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광주의 유혈진압이 없었을 것이라는 문대통령의 무책임한 역사인식이 안타깝다. 부채의식 때문에 역사적 가정이 합리화되거나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은 목표가 정해지면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목표를 달성하도록 규율된 조직이다. 군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고지를 점령하면 되는 것이지 작전 중 희생은 부차적으로 치는 조직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계엄치하로 5.15. 서울역 시위 주변에서 계엄군은 이미 무장하고 출동대기 상태였다.

 

51518:25경 서울역 광장 5킬로 주변에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30, 33단 병력 670명과 전차 8, 장갑차 22대가 출동해 대기하고 있었으며 1, 2, 3군 지역 내에 있는 71개 송전국과 중계소에 계엄군 1,067명을 출동시켜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20사단 3개 연대를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에 출동시켜 대기해 있었다.”(육본작명 제16-80, 17-80)

 

민주당 김부겸 국회의원도 최근 광주의 비극은 서울역 회군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문대통령과 동일한 인식이다. 그러나 대통령부터 앞장선 역사의 왜곡은 역사의 불행에 다름 아니다. 부채의식이 역사왜곡까지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서울역 회군이라는 단어의 부적절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회군이라면 위화도 회군처럼 어떤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진군하다 방향을 돌릴 때 쓰는 말이다. 이 회군이라는 단어는 어떤 희생이 생겼더라도 당연히 청와대로 진군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말이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5.15. 서울역 시위는 정권탈취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계엄령해제 등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패잔병으로 서울역 광장에서 해산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TV·라디오 생중계 기자회견을 얻어낸 뒤 밤늦게 각 학교별로 해산했다.

 

좀 더 치열한 민주화 시위의 구체적 실행방안을 마련하고자 이튿날인 5.16. 전국 5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준비하면서 우리 십만 학우들은 어깨걸이를 하고 각각 학교로 걸어서 돌아갔다. 이화여대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회의가 5.17.에도 마라톤 회의를 진행하던 도중 계엄군의 급습으로 서울의 봄이 중단될 때까지 우리는 민주화의 늦은 봄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0. 5. 18.

국회의원 심 재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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