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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거두 노무현씨의 3.1절 돌출발언
2004.03.04
시사논객 | 조회 132
노무현씨가 대통령 취임 열흘도 채 안되었던 2003년 3월 4일 그의 돌출발언이 국제 사회의 화제거리였다. 그 이틀전인 2003년 3월 2일 오전 북한의 미그 29 등 전투기 4대가 정찰 중이던 미군 RC-135S 정찰기 바로 옆까지 접근하여 발사 조준을 하였던 16분간의 아슬아슬한 사건이 있었다. 공해상에서의 정찰을 북한 전투기들이 무력 저지한데 대해 미국이 몹시 분노함에도 노무현씨는 영국 더 타임스 지와의 인터뷰에서 또 북한의 대변인 역할을 하여 북한을 변호해 주었다. 공해상에서의 정찰을 방해한 것은 북한이요, 미국이 북한 핵 시설 재가동에 대한 공중 정찰은 당연한 것이며, 또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위한 정찰이었음에도 노무현은 그 위기 발생의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더구나 그것도 부시 대통령한테 "너무 많이 나가지 말라"(not to go too far)는 조언까지 하면서, 게다가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제3자인 영국 언론에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노골적으로 흘리면서 말이다.

외교에 관한 한 엉터리 변호사 출신다운 노무현씨가 무엇보다도 국민을 놀라게 하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가 미·북 직접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왜 핵무기 벼랑끝 외교를 벌이는가? 미국의 파격적인 원조 제의도 거절하며 왜 한사코 미·북(조미) 양자 대화를 요구하는가? 북한의 속셈은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통일대통령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하는 적화통일을 합법화하려는 것이요, 그 일차적 단계로서 북미불가침 조약, 주한미군 철수, 한미 동맹 해체를 요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국이 한사코 북미 양자 회담을 거절하고 다자 회담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적화통일을 합법화하려는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노무현은 북한의 주권을 인정해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식 연방제로 통일하자고 한다. 그것은 즉, 합법적인 적화통일을 의미한다. 북한이 인정해 주지 않는 대한민국 주권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미국이 인정하여 주며, 국제 무대에서의 미국의 외교로 세계 각국이 대한민국 주권을 인정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현씨는 미국의 품을 떠나 북한의 품 속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주권을 인정받을 근거를 버리자는 것, 남한의 주권은 김정일 손에 있다는 김정일 주장을 지지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엉터리 변호사 출신다운 노무현의 외교정책은 그의 외교가 일제시대 때 임시정부가 하던 자주 외교에 비해 너무 촌스럽고 너무도 대조적이다. 북한은 우리 민족의 장래가 결정되는 이런 중대한 회담 상대로 대한민국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데, 노무현은 김정일에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권한을 위임하려 한다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비록 노무현씨가 흑색 선전과 부정선거운동 으로 당선되었어도 그에게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손톱만큼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그는 금년(2004년)의 3.1절 기념사에서 다시 한번 무참하게 짓밟았다.

21세기는 외교 경쟁의 시대이다. 21세기의 국력은 외교이다. 그래서 강대국들도 선진국들도 더 많은 친구 나라를 가지려고 외교 총력전을 벌인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는 뛰어난 외교적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 많이 있었다. 6.25 동란 중 한미 상호방위 협정체결을 받아내신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 외교의 명수였으며, 미국에서 고급 산업 기술을 이전해 오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외교의 명수였으며, 한국 기업의 미주 수출 시장을 전략적으로 확대하신 전두환 대통령은 통상 외교에 뛰어났었다. 그런데 노무현씨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마저 혼동시키는 외교를 하고 있다.

노무현의 외교는 미국에 큰소리 치고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에 말려들어가는 외교이다. 그러나 국민도 노무현이 우리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아야 한다. 북미불가침 조약을 맺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남한을 내놓으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해 주겠다는 것이 김정일의 벼랑끝 외교 협상 조건이다. 그는 적화통일을 원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며, 미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지난해(2003년) 1월 29일 북한에서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온 임동원 특사가 지니고 갔던 친서에는 두툼한 경제 지원 패키지가 있었으나 김정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엄청나게 매서운 추위를 느끼며 되돌아오는 임 특사의 등 뒤에 이것은 북한(북조선)과 미국 양자 회담으로 해결할 일이니 남한은 끼지 말라는 차가운 말이 전해졌을 뿐이다. 그 뜻이 무엇인가? 한민족의 장래를 결정할 외교 대표권은 북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김정일 꼼수를 꿰뚫어 보고 있던 미국이 북한이 북미 양자 회담 요구를 거부한 이유이다. 그런데 진정한 주권 외교는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천명할 때 비로서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씨는 주권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면서 주권이니 독립이니 떠들어 대고 있다.

노무현씨는 김정일의 적화통일 야욕을 정말로 모르는가? 김정일이 휴전선 일대에 병력을 증강시킨 이유를, 김대중 대통령이 지원해 준 달러로 40대의 최신 미그기를 러시아에서 수입하였으며, 핵무기 개발을 하는 이유를 모르는가? 김정일이 노무현 후보 당선 선물로 당선 다음날 아침 영변의 핵 인봉을 떼었으며, 그의 취임 선물로 그의 취임식 하루 전에 동해에 미사일 발사로 축포를 쏜 이유를, 그리고 노무현 후보의 부정선거운동을 지원한 김정일이 노무현씨의 취임하자마자 인터넷과 각종 전단에 통일대통령 김정일이란 문구를 넣은 심리전술의 의도를 정말로 모르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엉터리 변호사 출신이라지만 금년 삼일절 기념사에서도 김정일을 위한 엉터리 변호를 한다는 말인가.

미국 워싱턴 정계는 노무현 당선자의 대미 특사단이 방미하기 보름 전인 2003년에 1월 18일에 RICHARD V. ALLEN 이 "Seoul's Choice: The U.S. or the North"이란 제목으로 뉴욕타임즈에 기고하여 "한국이 더 이상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입장을 분명히 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즉, 노당선자의 대미 특사단이 한국의 정체성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지 공산주의 국가인지 분명한 대답을 갖고 오라는 뜻이었다. 그 후 일년이 조금 지난 삼일절에 노무현씨의 반미 선언이 또 다시 뉴욕타임즈 기사가 되었다. << "친미냐, 반미냐를 더 이상 논하지 말자" 라고 노씨가 말하자 환호갈채를 받았다. "친미나, 반미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는 잣대가 될 수 없다." >>(``Let's not talk about whether we are pro-American or anti-American,'' Roh said to rousing applause. ``Whether we are pro-U.S. or anti-U.S. cannot be the yardstick to assess ourselves.'')

"한국이 더 이상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입장을 분명히 해달라"는 미국의 요구에 대한 노무현씨의 답변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겠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씨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을 보장해 주는 미국의 품을 박차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인정하여 주지 않는 북한 김정일 공산주의 체제의 품으로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노무현씨가 김정일 공산주의 왕조의 정권을 한반도의 유일한 정권으로 인정하자는 김정일의 주장에 동의할 때 여기에는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저버리겠다는 의미가 있으며, 미국을 향하여 직접적인 반미 선언을 하였을 때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 주권의 기반을 무너뜨려 김정일에게 합법적 적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해 주려는 꼼수가 숨어 있다.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었다. 왜 나라를 잃었는가? 일차적으로 외교적 실수로 나라를 잃었다. 나라의 주권이란 엉터리 변호사 노무현처럼 혼자 떠든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인정해 줄 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오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와 쇄국정책의 결과로 국제 사회에 우방도 외교망도 없었던 우리나라는 일본의 침략 전술에 사로잡혀 나라를 잃었다. 노무현은 그 민족적 쓰라린 경험을 잊었는가? 왜 국제사회의 미치광이인 북한 김정일에게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외교권을 양도하려 하는가?

대한민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외교권을 국제 사기군 김정일에 양도하려던 노무현의 어설픈 외교에 비해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는 국제 사회에서 민족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너무도 휼륭한 외교였다. 흔히, 우리가 독립운동을 해서 주권을 되찾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독립운동 정신을 기릴 필요는 있을지언정, 보다 역사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우리 민족은 세치 혀의 휼륭한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주권 국가로서의 위치를 회복하였다.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이 독립 운동하는 방법에 크게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상해 임시정부처럼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독립군에는 다시 오늘날의 우익인 민족주의 독립군과 오늘날의 좌익인 공산주의 독립군 양대 진영이 있었다. 여하간, 우리 민족의 해방은 독립군의 무장 투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김구 선생이 그 대표자였던 중국 상하이의 임시 정부와 이승만 박사가 그 대표자였던 미국의 독립지사들의 외교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0년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상실하였다. 당시 상황으로는 영영 이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의 주권이 상실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독립선언의 중요성은 그것이 단지 거리 시위에 끝나지 않고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근에 KBS취재팀은 3.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프랑스 빠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단이 제출한 청원서를 발견하였다. 불어로 작성된 이 청원서는 한국이 1882년에 체결된 한미 수호 통상조약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과 맺은 조약으로 국제사회에서 자주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던 사실을 논증하였다. 또, 1919년 8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선언서의 사본을 각국정부에 보낸 외교문서도 발견되었다. 영문으로 된 이문서에는 임시정부의 철인이 찍혀 있고, 유럽지역 외교를 담당한 빠리위원부의 대표 김규식 선생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서명이 담겨있다.

또한 빠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프랑스 대통령 클래망소에게 요청하는 청원서와 임시정부의 각료명단을 각국정부에 알리는 통지문등도 자료에서 확인됐다. 임시정부 대표단은 빠리에서 "자유한국"이라는 불어판 월간지를 발간해 독립운동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세계여론에 호소했던 사실들도 확인됐다 (http://mapage.cybercable.fr/oniva1/240315/240315_7.htm ). 우리 정부가 내 나라 땅에 있지 못하고 만리 타향에 세들어 있어야 하는 땅 없는 정부요, 이천 만 국민이 있으되 국민이 없는 정부요, 각료들이 콩나물국과 소금으로 끼니를 잇는 가난한 정부였으나, 그럼에도 분명한 주권 의식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해외에 알리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하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물론, 상해 임시정부도 마침내 1940년 9월에 광복군을 창설하였으며, 이듬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중국·영국·미국 등 연합군과 함께 연합 작전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는 초창기부터 우리 민족의 주권을 국제 사회에 천명하는 외교 정책으로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는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규식을 외무 총장 겸 전권 대사로 임명하여 그곳에서 개최된 강화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1919년 9월 대통령이 되면서 파리의 파리 위원부와 필라델피아의 한국 통신부를 구미 위원부 산하에 흡수시킨 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노력은 마침내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 그 결실을 본다,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카이로 선언은 한국을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국제 사회의 의지를 처음으로 공약한 의의가 크다. 그럼에도 이 선언문의 “때가 되면”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이 당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 지도자들의 가슴을 애태웠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막연한 표현에 대한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난다. 남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에 흑해를 마주보는 얄타(Yalta)라는 도시가 있다. 바로 이 도시에서 1945년 2월에 이차 대전 종전 이후의 일을 논의하는 얄타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런데 1945년 2월에 얄타 회담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의 위상의 변화이다. 여태까지 소련은 국토는 가장 넓으면서도 대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얄타 회담을 시점으로 중국의 장 개석 총통은 국제 사회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소련의 스탈린이 새 강자로서 떠오른다. 안으로는 공산당 게릴라와의 내전에 시달리며 밖으로는 항일 투쟁하던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아시아의 강대국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분명 미국은 아시아 전역에 산재해 있는 일본 지상군과의 전투에 소련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미국이 러시아를 도와 독일군을 공격하였으니 이번에는 러시아가 북쪽에서부터 일본군을 공격해 줄 차례였다. 그러나 만일 루즈벨트는 러시아의 스탈린은 영국의 처칠이 아니라 도둑놈 심보를 가진 자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한국이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는 독립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미국, 영국, 소련 및 중국 4개국이 한국을 신탁 통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스탈린이 동의한 이 안이 선언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것을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행사의 명분으로 십분 활용한다. 어느 한 강대국이 한국의 새 정부 수립 과정에 독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루즈벨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만일 그때 루즈벨트의 건강이 좋았더라면 보다 신중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품는다. 두 달 후 그는 그의 병환으로 대통령 임기 중 서거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거한 며칠 후인 4월 29일 마침내 독일은 항복하고 ,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의 교외 포츠담에서 개최된 회담에는 미국의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과 소련의 죠셉 스탈린(Joseph Stalin) 등 3개국 정상이 각각 군사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미군 지휘관들은 소련이 대 일본 전쟁에 참전할 것을 종용하였으며, 소련군 지휘관들은 한국에 일본군 기지가 있으니 미국이 한국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공격 대상은 일본 본토이지 한국이 아니라는 것이 미국측의 답변이었다.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이 이행될 것을 천명하였다. 8월 8일 대 일본 전쟁에 참전하면서 소련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서약하였다. 다음날 소련군은 만주에서 활동 개시를 하고 한국의 북쪽 접경 지대에 이르렀다.

이렇듯, 카이로, 얄타, 포츠탐 등에서 미국이 주도하여 세차례 열린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실로 끈질긴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의 결과였다. 외교는 국력이요, 주권의 원천이다. 일본은 한반도가 일본 영토로 표시된 세계 지도를 내밀었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영토 없는 상해 임시정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일본은 1910년에 한일 양국간에 체결된 한일합방 문서가 있으니 한반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그 이전에 이미 우리 민족이 주권 국가로서 외국과 조약을 체결한 사례가 있음을 증명할 외교적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주권이 우리 민족에게 있느냐 일본제국에 있느냐의 논쟁에서 우리 민족에 있음을 당당히 증명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연약한 정부였던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전에서 일본제국을 이겼다. 이토록 우리 민족이 주체가 된 외교는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후 왜 우리 민족이 분단되었던 것일까? 여기에 독립군 활동이 초래한 문제점이 있었다. 우리는 숭고한 독립군들의 정신을 이어받되 독립군은 다같은 독립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수의 독립지사들은 사재를 털어가며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독립군에는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있었는데, 민족주의 진영 독립군은 우리 민족이 사재를 털어 지원하였던 데 비해 공산주의 진영 독립군은 그 반대 입장이었다. 예를 들어, 중국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는 혁명에 성공하면 지주들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군인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꾐으로 모집되고 구성된 삘갱이 부대였다. 조선인들도 그들의 군대에 속해 있으면 똑같은 혁명 사상을 가지게 됨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 독립군들은 순수한 독립지사들이라기보다 오늘날의 한국 좌익의 원조인 혁명 투사들이었다. 우리는 그들도 독립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소속 독립군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기네 부대 소속 군병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소련파 독립군들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군 소속 군인들이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독립군들의 소속은 어디었느냐 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그 문제는 국토의 분단을 초래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좌익 독립군 활동은 우리 민족의 주권 찾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하였을 뿐이었는지 살펴 보자. 1945년 8월 11일 미국이 작성한 한국 주둔 일본군의 항복 조건 문안의 일반 명령 1호에서 삼팔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에 그리고 삼팔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 항복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방송으로 항복을 발표하자 삼천리 반도 강산에는 해방의 기쁨과 감격이 충만하였으며, 미국은 승전 경축으로 들떠 있었다. 그후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극동의 CIA는 소련군이 북한에서 계속 남진하고 있다는 첩보를 워싱톤에 긴급 보고하였다. 이에 당황한 워싱톤 행정부는 9월 8일에 하지 중장이 인솔하는 미군을 남한에 급파한다. 다행히 소련군은 정확히 북위 38도에서 남하를 멈추었으며, 미군은 서울에 입성한 다음날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다. 북한에서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을 지원하는 소련군 주둔 사령부의 군정이 곧바로 시작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잠시 행정과 치안의 공백기가 있다가 역시 곧 군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왕래할 수 있는 분단이었으나, 1948년 8월과 9월에 남한과 북한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별개의 독립을 하므로 남한과 북한은 영토의 분단은 물론이요 정치 체제까지 다른 분단 민족이 된다.

그럴진대,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군에게 총한번 쏘아본 적 없는 러시아 군대가 우리 민족이 해방되자마자 무슨 명분으로 삼팔선 이북까지 진군하였는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 명분은 러시아군 소속 독립군들이 있으니 러시아는 한반도 영토에 친러시아 정부를 수립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1950년 초겨울 UN 군과 국군이 북한 영토를 모두 탈환하였을 때 어째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쳐내려와 다시 국군이 삼팔선 이남으로 후퇴하게 하였는가? 중공군 소속 독립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1949년에 중국 본토 전체를 정복한 모택동의 중공군이 4년만 빨리 본토를 장악했어도 우리 민족이 해방되자마자 중공군이 한반도로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차마 삼팔선 이남까지는 욕심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모택동이 팔로군 소속 독립군들을 내세우며 한반도에 중공군을 보냈다면 제주도까지 접수하려는 욕심을 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 태생이 사대주의인 한국 좌익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에서 해방된 다음에 러시아나 중국 영토로 편입되게 할 위험이 있었다. 그런데, 좌익 독립군들의 이런 과오를 막은 것이 상해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였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우리 민족의 주권은 우리 민족에 있음을 국제 사회에서 분명히 천명하는 찬란한 외교의 빛나는 성과였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데 대해 우리는 미국에 고마움을 느끼되 또한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의 외교적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잠시 국토를 일본에게 빼았겼어도 1919년 기미년 3.1일 독립선언 후 우리의 주권은 연연히 이루어져 왔다. 러시아 사대주의에 찌든 소련파 빨갱이들은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와 미국의 도움으로 우리나라가 해방되니깐 러시아 군대의 지원을 받아 삼팔선 이북의 영토를 도적질해간 자들이다.

그럼에도 노무현씨는 자기나라 역사마저 거꾸러 이해하고 있다. 盧武鉉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그는"이제 용산기지 이전이 결정되었다. 몇년 지나면 용산기지는 우리 국민들, 우리 서울시민들에게 반환될 것이다.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이던 그 용산기지가 우리 국민들의 손에 돌아온다"고 말하였다. 만일 우리 민족의 해방의 기쁨과 독립의 선물을 안겨주고, 우리 영토에서 일본군이라는 외세를 몰아낸 미국의 우정의 상징이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이라고 노무현씨가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그는 친일파임을 드러낸다. 만일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여전히 일본 영토요, 대한민국의 건국도 없었을 것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며, 삼일절 기념행사도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을 우리나라에서 해산시키기 위해 입국한 미국의 우정을 노무현씨가 간섭과 침략의 상징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대단히 친일파적인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가 친일파는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친일파의 거두가 친일파를 청산할 때 그 청산 대상 제1호는 누구이어야 하는가?

______________
* 이인제 의원의 국회신상발언 “그들의 음모와 싸워야 한다”를
http://ncolumn1.daum.net/dist/intro?sid=02H8t&eid=0GtSz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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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거두 노무현씨의 3.1절 돌출발언 [2] 시사논객 2004.03.04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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